평론

2009 전시평론 및 리뷰

시각예술가 이재환 2016. 1. 24. 14:12

나는 몽둥이가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몸을 돌린다. 몽둥이가 내 얼굴 전체에 떨어진다.

“눈이 안 보여!”

나는 순간적으로 내리 닥친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피를 삼킨다. 뭔가가 얼굴에 번진다. 그것은 처음에는 따뜻하더니 나중에는 활활 타는 듯 쓰라리다. 나는 발을 구르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를 지르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한 바퀴 돈다.

내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창조의 기적, 어쩌고 하면서 뭔가 말하려고 했을 테지만, 그것은 한 줌의 연기처럼 손에 잡혀지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딱정벌레와 지렁이, 바퀴벌레와 개미 같은 벌레들도 그들 나름의 다양한 방식으로 창조의 신비일 텐데, 우리는 그들을 발로 짓이기며 사는 것 같다.

나는 눈에서 손을 뗀다. 뿌연 세상이 눈물 속에서 헤엄을 치면서 다시 나타난다. 나는 그것이 너무 고마워 고통마저 잊는다. 그들이 나를 양쪽에서 끼고 감옥으로 데려간다. 군중이 웅성거린다. 나는 미소를 짓기까지 한다.1)

 

 

 

품위와 체면, 정의(情義), 도덕, 윤리 따위들은 폭력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 진다. 여기서 말하는 그 개념들의 ‘나약함’이란 폭력이 그러한 의지들을 쉽게 꺾는다거나 폭력이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폭력은 정전(停電)이나 음소거, 썬팅해 놓은 유리처럼 물리적 한계를 만들어 낸다. 이 한계들은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을 쉽게 차단해낸다. 안면에 몽둥이세례를 맞으면서 정의를 외칠 수 없으며, 온몸이 꽁꽁 묶인 체 품위 있게 걸을 수 없다. 위의 인용한 글은 『야만인을 기다리며』라는 소설에서 군인들이 원주민 포로들을 폭행하는 모습을 본 치안판사가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소리치다 몽둥이를 맞는 장면이다. 그는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과 폭력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경험한다. 알몸으로 광장에서 로프를 뛰어넘는 재주를 부리고, 여성의 드레스 차림으로 손목이 묶이고 겨드랑이에 밧줄을 끼워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채 나무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는 치안판사의 모습에서 폭력은 자신의 우월함을 한껏 과시한다. 생명의 소중함, 원주민 포로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그의 생각은 뭇매질에 의해 단절되고 묵살된다.

이 막강한 ‘폭력’은 여러 가지 장치들을 통해 분화되어 삶 속에 퍼져 있다. 마치 드래곤볼이나 몇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세상 어딘가에 숨겨놓은 악마의 문양처럼 말이다. 하지만 폭력은 이들처럼 물리적 세상 속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와 의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재환의 <폭력 분석>은 폭력의 속성을 컴퓨터 코드와 컴퓨터에 대입해보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 작가는 ‘구조’와 ‘실체’를 각각 ‘허상을 이루는 컴퓨터 코드’와 ‘코드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는 계산기(컴퓨터)’에 비유하며 이들의 우발적인 의미발현이 둘 간의 연관성을 제거하는 상황을 폭력으로 규정한다. 작가가 작성한 코드가 하드웨어들을 통해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순간, 그 작업들이 작‘품’으로 규정되는 순간들과 경제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어 작가의 의도로부터 벗어나는 순간들. 그 순간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폭력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폭력은 앞서 보았던 소설 속 치안판사가 겪었던 전면전의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이재환 작업 속에서 다루는 폭력은 모든 개념들이 겪는 당연한 과정들,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처럼 전면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이 변질을 폭력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맞대응 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조직화된 사회 속으로 녹아 든 폭력은 그것 역시 조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프랑스의 한 철학자의 연구로 ‘왕’이 갖고 있던 그로테스크한 권력이 어떻게 스스로를 규율과 사회 속에서 미분화할 수 있었는지 밝혀졌다. ‘그로테스크’함은 한 개인이 구조체 속에서 개인이 가질 수 없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그로테스크한 권력이 사회의 기구들에게 나누어 이양되어 있는 현대에서는 알 수 없는 그로테스크함이 조직 속에 기생하고 있다. 이 그로테스크함이 이재환이 바라보는 폭력이 아닐까. 글의 처음에서 살펴본 것처럼 폭력은 ‘무력화’의 도구이다. 억압하고 강요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특히나 물리적인 폭력의 경우는 가시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 그로테스크함에서 비롯된 조직 속의 폭력은 억압하고 강요하면서도 보이진 않는다. 이 보이지 않는 폭력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어쩌면 대항이라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은 아닐까.

이 상황에서 작가는 ‘입신중정(立身中正)’의 자세를 취한다. 입신중정은 태극권에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폭력에 대항하는 자세이다. 어디서 날아 들어올지 모르는 적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이 자세는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폭력에 저항한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말도 안 되는 것을 기어코 말하는 것”이 자신의 살아가는 태도라는 이재환의 이야기에 비추어 본다면 그의 이 무모한 도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마냥 무모한 것만은 아닌데 그 이유는 그가 취하는 방식이 ‘분석’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중하게 폭력을 다룬다. 폭력을 저지하거나 상황을 역전하려는 시도가 아닌 폭력에 대한 분석적 작업을 한다. ‘본질에서 멀어지는 상황’이 너무나 당연함에도‘하나의 장치’를 만들어 그 장치가 상황 속에서 작동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이러한 작업 역시 결국 폭력 속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 종착점이 정해져 있다. 아무리 입신중정의 자세로 작업에 임한다 한들 작업은 결국 작‘품’이 되는 폭력적인 과정들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업을 주목하는 이유는 마치 헨젤이 숲 속으로 들어갈 때 빵 부스러기를 떨어뜨려 길을 표시했던 것처럼 이재환의 작업이 그 작업이 작‘품’이 되어가는 과정을 드러내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물론, 그 빵 부스러기들을 집어 먹는 잡새떼들이 없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백창현 (전시기획) 2009

 

 

1)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왕은철 역, 들녘, 2003, p.183-4